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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Story>Film&tech
인간을 지키는 섬유
이경원 과학 칼럼니스트

‘모든 영화는 재난 영화’라고 했던가? 영화 속 주인공들은 극한 환경에 내팽개쳐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그들을 극한 환경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석유화학 섬유 제품이 있기 때문이다.
꿈을 현실로 이뤄주는 석유화학 섬유 제품들을 알아보자.

총알을 막아라 <배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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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영화 <배트맨>. 이 시리즈에서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으로 변신해 고담 시티를 악으로부터 지킨다. 이때 입는 배트 슈트는 총탄과 폭탄 파편으로부터 착용자를 방호한다. 이러한 옷은 현실에도 존재한다. 석유화학 섬유로 이루어진 방탄복으로 말이다.

총기는 중세를 몰락시켰다. 체력에 상관없이 누구나 하루만 배우면 바로 전투에 투입시킬 수 있다. 중세 기사들이 입던 갑옷 따위는 간단히 무력화시켰다. 하지만 창이 발전하면 방패도 발전하는 법. 섬유의 발전이 총탄을 막는 해법을 제시했다. 축구 골대의 네트가 축구공을 막듯이, 매우 질긴 섬유를 충분히 두껍게 겹치면 총탄을 막을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면, 실크 등의 천연섬유로 방탄복을 만들어 입었다. 하지만 천연섬유는 변질되기 쉽고, 일정 수준 이상으로는 내구성과 방탄 능력을 높일 수 없다. 그러던 중 발명된 나일론을 필두로 한 각종 석유화학 섬유는 방탄복 개발자들의 고민을 덜어줬다. 천연섬유보다 훨씬 인장 강도가 높으면서도 가벼워 방탄복의 소재로 적합했다. 나일론은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방탄복 소재로 많이 활용됐다. 이후 케블라 섬유, 다이니마 섬유, 스펙트라 섬유 등 다양한 합성섬유가 개발돼 방탄복의 소재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섬유제 방탄복에는 태생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경도가 낮은 섬유라는 한계 때문에 칼이나 송곳 등 경도가 높은 예기의 공격에는 약하다. 비슷한 이유로 구경이 작아 저항도 작고, 속도가 권총탄보다 상당히 빨라 운동에너지가 높은 소총탄이나 탄심에 철 등 경도 높은 금속을 넣은 철갑탄의 공격에는 비교적 쉽게 뚫리는 것이다. 그 때문에 현대의 방탄복에는 별도의 방탄판을 넣어 이런 공격에 대한 방어력을 확보하는 경우가 많다. 방탄판의 재질은 티타늄 등의 금속도 있지만 세라믹, 고강도 플라스틱 등 가벼우면서도 총탄보다 우수한 경도를 확보해 명중한 총탄을 깨버릴 수 있는 인공 소재도 많이 사용된다.
  • ❶ 케블라 섬유 : 정식 명칭은 파라 아라미드. 케블라는 상품명이다. 1965년 듀폰사에서 개발된 아라미드 계열 섬유다. 강철의 5배에 달하는 인장 강도와 고내열성이 특징이다.
  • ❷ 다이니마 섬유 : 초고분자량 폴리에틸렌 섬유의 일종이다. 인장 강도가 무려 강철의 15배에 이르는, 가장 강도가 뛰어난 합성섬유 중 하나다.
  • ❸ 스펙트라 섬유 :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최강의 합성섬유 중 하나다. 다이니마와 마찬가지로 초고분자량 폴리에틸렌 섬유이지만 분자구조는 약간 다르다. 다이니마에 비해 경화, 균열, 변형에 견딜 수 있는 내피로성은 좀 더 우수하지만, 내마모성은 다소 모자란 특징이 있다.
  • ❹ 예기 : 끝이 뾰족하거나 날이 예리한 물건
작은 우주선을 입자 <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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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서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SF 영화 <더 문>. 달에는 공기가 없으므로 주인공은 달 표면에서 활동할 때 우주복을 입는다. 이 우주복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다름 아닌 여러 가지 석유화학 섬유로 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첫 번째로 꼽히는 것이 나일론이다. 나일론은 엄밀히 말해 상품명이고, 본 이름은 폴리아미드Polyamide수지다. 1935년 미국 듀폰사의 월리스 캐러더스가 발명한 폴리아미드수지는 사상 최초의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이다. 일반 생활 잡화와는 달리 고강도, 고내열성이 필요한 구조재 및 기계 부품 소재로 적합한 물성을 지녔다. 나일론은 발명 당시뿐 아니라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매우 우수한 화학섬유다. 오늘날 생산량의 70%를 차지하는 나일론 6의 경우 고온 열처리를 통해 주름을 잡을 수 있고, 햇빛과 마찰에 내성이 강하며, 내열온도는 256℃, 인장 강도는 무려 철의 6배에 달한다. 나일론은 의류, 기계 부품, 의료용품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고 있다. 물론 극한 환경에서 입는 우주복의 재료로도 쓰인다.
속옷까지 방화복 <F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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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 <F1>이 내년에 개봉될 예정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F1, 즉 포뮬러원 자동차경주 레이서들의 이야기다. 이 레이서들의 복장을 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바로 겉옷은 물론 속옷과 패치까지 노멕스Nomex 방염 섬유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좁은 운전석 내에서 차량을 운전하는 경기 특성상 만에 하나 화재가 발생할 경우 무사히 탈출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노멕스 섬유는 고온에 노출돼도 녹거나 연소되지 않는다. 따라서 착용자의 화상 위험을 최소화한다.

노멕스는 어떻게 이러한 물성을 갖게 된 것일까? 노멕스의 본 이름은 메타 아라미드 섬유다. 이 섬유는 ‘방향족 폴리아미드 섬유’의 일종으로, 분자구조의 골격인 벤젠고리가 직선으로 연결돼 있지 않다. 때문에 녹는점, 분해점, 2차전이점이 높아 고온에서도 기계적 특성이 유지되며 장시간 열열화, 즉 고온의 상태에서 화학적 성질이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재료의 물성이 저하되는 현상이 적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계산소지수(재료가 연소를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산소 농도)가 지구 대기 중 산소 농도를 뛰어넘는 29~32% 수준이다. 바로 이 때문에 노멕스 섬유는 지구 대기 중에서 연소를 지속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노멕스 섬유제 경기복은 각종 자동차경주의 필수 장비로 지정돼 있다. 그 외에도 소방관용 방화복, 항공 승무원용 비행복, 군용 장갑차량 승무원복 등 방화 성능이 필요한 여러 복장의 주된 소재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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