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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ism>슬기로운 기술 생활
개발 기술 완성도의 지표,
TRL
김형자 과학 칼럼니스트

일반인에게는 생소하지만 연구개발R&D을 하는 연구자에게는 익숙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기술 성숙도TRL’입니다.
연구개발 과제를 수행할 때 기술의 현재 성숙도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이디어나 기술이 현재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 평가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로드맵을 그리는 데 필수적 개념인 TRL에 대해 살펴볼까요?

TRL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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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L은 1974년 NASA에서 우주산업의 기술 투자 위험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처음 고안한 개념이다.
내가 하고 있는 사업이나 연구를 외부에서 평가할 경우, 외부 기관은 기술 성숙도 개념을 접목해서 평가합니다. 우리가 흔히 ‘기술 완성도’ 또는 ‘기술 성숙도’라고 번역하는 TRLTechnology Readiness Level은 기술의 개발 단계를 알려주는 지표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아이디어나 기술이 개발 초기 단계부터 상용화되는 최종 단계까지 얼마나 완성도를 갖추었는지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척도인 셈입니다.

TRL은 다양한 기술 및 산업 분야에서 특정 기술의 성숙도를 평가하거나, 서로 다른 기술 유형 사이의 성숙도를 지표에 근거하여 측정하고 비교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상호 기술의 성숙도에 대한 정보를 원만하게 교류하며 혼돈을 줄이기 위해서는 주관적 지표가 아닌 일관성 있는 객관적 지표가 필요합니다. TRL을 활용하면 기술의 개발 상태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이를 통해 기술사업화 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TRL은 1974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우주산업의 기술 투자 위험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처음 고안한 개념입니다. 그리고 1989년 공식적으로 TRL의 평가 체계를 규정했습니다. 이후 1990년대에 미국 국방부DoD에서 국방부 추진사업의 위험도 관리 방안 차원으로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에는 일본을 비롯해 유럽우주국ESA과 유럽위원회EC, 미국석유협회AP 등에서 도입해 쓰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떨까요. 한국은 2000년대 연구개발 성과를 관리하기 위해 국방·부품 소재 개발 분야에서 처음 도입했습니다. 현재 정부, 지자체, 기관의 국책 과제 등에 TRL 평가 체계를 수립해 활용하고 있습니다. 신약, 생물학적 제제 백신, 의료기기, 바이오마커, 의료 기술 등에도 TRL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TRL은 연구 결과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가 사업화에 성공할 수 있도록 돕고자 만든 수단입니다. 한국의 TRL 평가 체계는 기본적으로 NASA의 모델을 기반으로 하지만, 국내 산업구조와 특성에 맞게 약간의 변형이 가해졌습니다. 현재는 민간 연구개발R&D 프로그램에도 맞게 재정의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TRL은 기술의 완성도를 숫자로 나타냅니다. 기초연구 단계부터 양산 단계까지 총 9단계로 나뉩니다. 연구개발 환경(실험실, 유사 환경, 실제 환경), 연구개발 결과물(시제품, 완제품), 기술 수준(개념, 시현, 성능 검증)에 따라 기술 성숙도를 분류하는 것입니다.

9단계는 다시 1~2단계의 기초연구 단계, 3~4단계의 실험 단계, 5~6단계의 시작품 단계, 7~8단계의 실용화 단계, 9단계의 사업화 단계로 세분됩니다. 이는 R&D를 하는 기술 수준이 개념 설계인지, 구현할 수 있는 정도인지, 바로 상용화 가능해 현장에 적용되는지 등에 따라 구분한 것입니다.
TRL의 숫자별 기술 완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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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L 단계별 기술의 레벨
9단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1단계는 기초 이론 및 실험을 정립하는 단계입니다. 기술개발의 가장 낮은 단계로, 기본 원리를 발견하는 과정이죠. 이를테면 새로운 소재가 얼마나 가볍고 강한지 확인하기 위해 물리적·화학적 특성을 연구합니다.

2단계는 기술개발 개념 정립 및 실용 목적의 아이디어에 대한 특허를 출원하는 단계입니다. 특정 기술 아이디어를 논문이나 특허로 정리하거나 시뮬레이션을 통해 작동 가능성을 확인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허출원을 거치면서 아이디어를 제3의 전문가 시각에서 객관화하고 정립합니다.

3단계는 실험실 규모의 기본 성능을 검증하는 단계입니다. 실험실에서 실험 또는 전산 시뮬레이션을 통해 기본 성능을 검증하고, 개발하려는 부품이나 시스템의 기본 설계 도면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기술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4단계는 실험실 규모의 소재·부품·시스템의 핵심 성능을 검증하는 단계입니다. 3단계에서 도출된 여러 결과 중 최적의 결과를 선택한 다음 시험 샘플을 제작해 평가하는데, 샘플이 계획대로 작동하는지 실험실에서 테스트합니다.

시작품 단계인 5단계는 확정된 소재·부품·시스템의 실험실 시작품 제작과 성능 평가가 완료된 단계를 의미합니다. 개발 대상의 생산을 고려하여 설계하지만, 실제 제작한 시작품 샘플은 하나 내지 몇 개 정도입니다. 경제성을 고려하지 않고 기술의 핵심 성능으로만 볼 때, 실제로 판매할 수 있을 정도로 목표 성능을 달성한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6단계는 파일럿 규모(복수 개수~양산 규모의 1/10 정도)의 시작품 제작 및 평가가 완료된 단계입니다. 파일럿 규모란 실제 생산 규모를 충분히 대표하면서, 실제 생산 규모 배치에 적용되는 것을 시뮬레이션한 절차에 따라 제조한 것을 의미합니다. 즉 실제 생산 규모 배치와 동일한 과정으로 제조하지만 생산 규모만 더 작은 규모로 제조한 것입니다. 6단계에서는 파일럿 규모 생산품에 대해 생산량, 생산 용량, 불량률 등이 제시됩니다. 공인인증기관의 성적서 확보가 가능한 수준의 목표를 달성한 단계입니다.

7단계는 실제 환경에서 성능 검증이 이루어지는 단계로, 부품과 소재 개발의 경우 수요업체에서 직접 파일럿 시작품을 현장 환경에서 평가(성능, 신뢰성, 수요 기업 평가)합니다. 7단계부터는 실제 제품화 단계에 진입하여 상용화를 시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약품의 경우 임상 2상과 3상 시험을 승인합니다.

8단계는 시제품 인증과 표준화 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기업의 신규 개발 기술이 TRL 8단계라고 한다면, 이는 시제품 제작 완료, 인증 및 인허가·표준화의 막바지 단계만 남겨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조선 기자재의 경우 선급기관 인증, 의약품의 경우 식약처의 품목 허가를 받습니다. 9단계는 본격적인 양산과 사업화가 가능한 단계에 해당합니다. 제품이 진짜로 시장에 출시되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품질관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개발 예산, 개발 일정 판단에 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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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L 단계별 정의는 시스템, 공법·기법, 재료·자재,
소프트웨어, 장비·장치 등 기술 분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TRL 단계별 정의는 기술 분야(시스템, 공법·기법, 재료·자재, 소프트웨어, 장비·장치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TRL이 높을수록 기술적 성숙도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TRL 4단계까지는 대학교나 연구 기관들이 검토(실험실 규모)하고, 5단계부터 파일럿 규모의 검토가 이뤄지기 때문에 기업들과의 연계가 시작됩니다.

TRL은 활용 측면에서 서로 다른 종류의 개발 기술에 대해 기술의 성숙도를 일관된 척도로 평가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집니다. 따라서 TRL 기준을 활용해 프로젝트를 관리할 경우 제품과 시스템 개발의 예산, 개발 일정에 대해 처음에 목표한 것을 달성할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제품 개발을 위한 기술이 미성숙 단계라면 그만큼 개발에 따른 위험이 높습니다. 그 위험은 개발 일정 지연 및 비용 상승을 초래하게 됩니다. TRL은 요구되는 기술과 현재 보유 기술 간의 격차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에, 개발하고자 하는 시스템의 기술적 위험을 관리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 회계감사원GAO이 2006년 국방 무기 개발사업 52개에 대해 분석해봤더니, 미성숙 기술이 개발 일정 지연과 비용 상승의 가장 큰 원인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에 따라 미 국방부는 사업관리상의 위험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TRL 6단계 이상에 도달한 성숙 기술에 한해서만 국방 무기 개발사업을 추진하도록 관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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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방부는 미성숙 기술을 개발 일정 지연과 비용 상승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고, TRL 6단계 이상에 도달한 성숙 기술에 한해서만 국방 무기 개발사업을 추진하도록 관리하고 있다.
또 유럽연합EU, 영국, 인도, 일본, 미국 등은 연구 초기 단계부터 지식재산권 및 규제 대응까지 고려하여 기술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과 영국은 재생의료 치료제 제품화를 목표로 하는 경우, 보험 급여 등재에 대한 계획까지 비임상 단계에서 평가 요소로 보고 있습니다. TRL 9단계(시판 및 시판 후)에서 평가지표로 삼고 있는 국내와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TRL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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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TRL은 왜 중요할까요. 일단 TRL에 대한 개념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어야 기술을 검토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막상 실무를 하다 보면 TRL 단계에 정확하게 맞춰서 진행할 수는 없겠지만, 놓치고 가는 것이 무엇인지 점검해보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기술 성숙도가 낮을수록 불확실성과 위험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울 수 있습니다. 필요한 자원(인력, 예산, 시설)도 TRL 단계에 맞게 효율적으로 배분할 수 있습니다.

또 TRL은 R&D 자금 지원, 상용화 투자 등 중요한 의사결정의 근거가 됩니다. 따라서 정부 지원을 받길 원한다면 정부 R&D 지원사업의 TRL에 지원하는 게 유리합니다. 또 투자자들로부터 투자를 받으려면 TRL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투자자들은 개발 기술에 대한 투자를 판단할 때 TRL을 참고 자료로 활용합니다.

TRL은 기업의 기술 완성도를 평가하여 ‘기술 특례 상장’을 지원하는 근거로도 쓰입니다. 만일 ‘기술 특례 상장’을 생각하고 있다면 TRL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TRL 개념을 생각하면서 체계적으로 사업과 연구를 진행한다면 여러모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분야 반영 부족이 단점
TRL에서 중요한 것은 핵심 요소 기술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즉 성능, 제작 과정, 재료 측정, 도구, 기반 시설 등을 고려해 해당 기술에서 핵심 요소 기술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기술 성숙도를 전문가 위원회를 통해 평가하는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TRL이 완벽한 건 아닙니다. 몇 가지 단점이 있습니다. 단계별 기술 성숙도를 측정해 그 수준을 제시하지만, 기술 수준을 향상하기 위한 구체적인 문제점이나 가능성을 명확하게 표시하지 않아 실제 개발 과정에서 부족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TRL이 우주개발과 같은 하드웨어 중심의 기술에 대한 평가에 편중되어 있어 소프트웨어, 제조 및 생산, 생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기술 수준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즉 기술에 대한 모든 측면을 대표하는 지표로서는 미흡한 점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때문에 제조 분야에서는 제조 성숙도MRL, Manufacturing Readiness Level를 활용하기도 합니다. 영국에서는 TRL의 단점을 보완해 총체적인 기술 성숙도 수준을 평가하기 위한 체계 준비 수준SRL, System Readiness Level을 개발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TRL은 기술개발 여정을 이끌어주는 길잡이입니다. 이 길잡이를 잘 활용해 내 기술이 지금 어느 단계쯤 와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효과적·효율적인 개발 성과를 창출해 상용화에 도달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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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자 과학 칼럼니스트
청소년 과학 잡지 <Newton> 편집장을 지냈으며, 현재 과학 칼럼니스트와 저술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구멍에서 발견한 과학>, <먹는 과학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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